이글은 원래 미국 이민교회 청년들을 위해서 써본 것이다. 1.5세 청년들도 "황홀하게" 보았다고 해서 궁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크리스천으로 이런 드라마를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의무감 같은 것도 느껴 몇 자 적어보았다. 이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라서 어설픈 글이지만 현대 영상문화의 성격을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천진석, cwn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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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문화는 더 이상 '대중문화'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문제를 꿰뚫고 다가올 시대정신을 열어주는 사람을 일컬어 ‘천재’라고 한다. 그 천재들이 어디로 몰리고 있는지 보면, 어떤 분야가 그 시대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 알 수 있다.

서양의 경우, 중세시대에는 천재들이 신학으로 몰렸었다. 근대 초기에는 정치학으로 몰렸고, 19세기 중엽에는 법학, 20세기 접어들면서 과학기술과 경제학으로 몰렸다. 그런데 21세기를 시작하는 현 시점에서 보면 시대를 읽고 시대를 전망하는 천재들이 대거 영상문화로 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르본느 대학의 란쯔만 교수가 만든 “쇼아” (홀로코스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라는 작품은 그 영상 문화의 최고봉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을 하나로 통합하여 홀로코스트의 “모든 것”을 보여준 영화... 어떠한 책이나 증언을 압도한 20세기말의 최고작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흥행에 초점을 맞춘 헐리우드 영화만 해도 스필버그의 “신들러 리스트”를 보라. 그 영화가 표현하고 전해주는 메시지의 영향력을 헤아려보라.

이제 현대사회에서 영상문화는 더 이상 대중문화로만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 혁신의 장이기도 하고 사회의 가치를 주도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더구나 스토리뿐만 아니라 화상, 음악이 동원된 총체적인 문화 표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을 묶고 푸는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이 영상문화이다.

2. "드라마 천국"이란 오명을 벗고...

한국은 드라마 천국이라고 불렸다. 독재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프로야구와 더불어 등장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드라마가 오늘날 순수문화 차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묶고 푸는 영향력 있는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 단지 극 차원이 아니라 탁월한 영상과 음악이 한데로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누르고 토산 영화가 흥행 1,2위를 차지하는 자본주의 나라가 한국이다.

자료를 보니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가 동남아로 수출되고 벌어드리는 돈이 제법 크단다. 관련 음악, 물품이 상품화되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더구나 관련 장소들이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른다고 한다.
그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다. 이런 생각이 든다. 수십 년간 피땀 흘려 자동차 만들어 팔아 벌어드리는 외화를 영상작품 한두 편으로 벌어드릴 수 있는 시대에 오지 않았는가? 한국이 문화산업, 특히 영상산업 대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충분히 그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만큼 그 시대의 천재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대거 영상문화로 뛰어드는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3.  "겨울연가"가 왜?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줄거리는 “여명의 눈동자” 나 “모래시계” 같은 시대성을 담은 의미 있는 내용과는 전혀 딴판의 유치하기 조차한 내용에 불과하다. 첫사랑... 기억상실... 최면으로 기억 대체...다시 만남... 기억 되찾음... 출생 신분 오해... 삼각관계의 옥신각신... 슬픈 해피엔딩... 스토리 전개도 “말도 안돼”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만화 같은 이야기이다. 억지 운명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등장하는 배우들의 몸짓도 보라. 느릿느릿... 옛날 무성시대 신파극을 하는 듯한 단순한 몸짓들... 아마도 2,30년 전에 이런 드라마가 나왔더라면 “집어치우라”라는 시청자의 아우성이 쏟아졌으리라. 그런데 이처럼 만화 같고 신파극 같은 비현실적인 드라마가 오늘날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감명을 준다니 대관절 어떤 조화일까?  

4. 영상문화를 읽는 마음의 틀이 바뀌었다

배우들의 인기,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아련한 첫사랑의 스토리... 이런 것들이 인기를 몰고 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중의 마음을, 특히 어린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를 이런 사실로만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것보다는 그런 영상문화를 수용하는 현대인들의 마음 틀 (framework of mind)의 특성을 읽을 필요가 있다. 겨울연가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그것은 그 드라마가 이 시대의 성격을 잔인할 정도로 잘 포착해서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울렸다 웃겼다할 수 있는지 그 마음의 흐름을 포착한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5. 포스토모더니즘의 비이성 포용 문화

오늘날 우리는 '사실'과 '신화'의 경계가 무너진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즉, 그동안 이성중심의 근대문화 가운데서 비이성적이라고 무시되었던  ‘운명’ ‘우연’ 혹은 ‘영(靈)’ 같은 단어가 리얼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귀신 영화라고 할 수 있는 'Ghost'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리얼하게 다가왔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관이 더 이상, 이성만능주의 문화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일컫는 그런 시대이다.

모더니즘이란 철저히 비이성적인 신화를 거부하고 과학적 합리주의를 숭상하던 문화이다. 그런데 이런 문화들이 가져온 기술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황폐한 인간상(유물론, 진화론, 허무주의...) 을 가져왔고, 결국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비이성의 영역 (감성, 느낌, 우연, 운명, 순환...)을 인간의 본질로 가져오는 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20세기 중엽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로 번진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같은 문화사조가 바로 이런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꽃을 피운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종교적 심성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할리우드 영화계를 강타하였고, 80년대부터 영화작품에 이런 정신이 내재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Back to the Future부터 Ｇｈｏｓｔ를 거쳐 Ｍatrix까지, 첨단의 기술문명을 인간의 심원한 비이성 차원 안에서 포용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신풍토에서는 '귀신‘이나 ’운명‘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흥미 거리로만 제공되는 색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리얼한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벌어지는 ’사실‘로 믿어진다. <점>이란 것이 더 이상 미신이 아니라 운명의 수레바퀴 가운데 작용하는 '영'의 '섭리'에 대한 인식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6. ‘겨울연가’ 모티브는 운명

‘겨울연가’는 ‘운명’이 (뒤집어 말하면 ‘우연’이) 사랑을 완성하는 모티브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충실한 것은 동시에 자신의 운명에 충실한 것이 된다. 그 운명을 말해주는 대목들을 보라.
운명의 수레바퀴를 보여주는 카드점....(성경적으로 말하면 ‘귀신’놀음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운명으로 엮어지는 두 주인공의 만남, 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운명이란 말...

기독교는 이성주의 문화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했었다. 그래서 이런 반이성주의 문화의 등장을 반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포스트모던 예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신학자도 있다. 최소한 비이성적 차원을 무시하지 않고 신중히 다룬다는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친화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사조의 심각성은 심원한 초월적인 진리들이 인간 그 자체 안에 내재하여 있거나 그 반대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운명과 우연에 종속된 존재라고 믿는 풍토에 있다. 이런 영상물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리들이 그것을 보고 무엇인가 삶에 유익이 되는 그 어떤 "행동"에 대한 자극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나르시즘 (자기도취, 자기해소)이다. 사랑과 운명의 결합. 겨울연가의 두남녀의 행동은 그래서 매우 운명 순응적이다. 여주인공이 알게 되는 ‘진실’은 거의 항상 수동적이다. 주변사람들이 다 알아서 가르쳐 준다. 아니면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 이걸 운명이라 한다. 그리고 첫사랑이 그 운명을 아름답게 포장해 준다.

결국 이야기는 첫사랑의 끈질김, 숭고함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그 첫사랑을 잇게 만들어 주는 것은 수동적인 운명이다. 사랑이란, 기억이란 이름으로 잡고 있는 자기만의 우주, 그 자기만의 우주 안으로 몰입하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중개자(agency)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확인된 첫사랑이 여과 없이 오늘날의 사랑으로 바뀐다. 이것은 일종의 마약과 같고 ‘영매’와 같은 것이다. 자기도취 속에서 현실의 자신을 넘어서 본래의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는 점에서... 어느 것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출자가 그려낸 여주인공의 마취된 듯한 얼굴을 보라. 사랑의 기억에 대한 마취. 그 상태에서 현실의 준상은 그대로 나의 사랑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첫사랑의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