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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직장생활(1)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

이곳은 우리가 더 철저한 신앙(신앙과 삶과 생활 일치된)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들을 나누는 곳입니다. 기독세계관이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근거들을 살펴 봄으로 왜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답해보고 추진력을 얻게 되길 바랍니다.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약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2-20 (수)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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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직장생활(1)
SMS(주권선교사방송)에 올렸던 [하나님과 함께하는 직장생활(1)]의 전체 원고입니다.

독일의 페터 아쇼프(Peter Aschoff) 목사님의 책 “하나님과 함께하는 직장생활” 중 일부

저자는 우리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열쇠는 생각과 마음에 있다고 확신하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놀라운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글의 제목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을 새롭게 발견해야 되는 이유-성전만으론 충분하지 않다”입니다.


.....매 월요일 아침이면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후기산업사회의 제국으로 5일간의 유배생활을 위해 길을 떠난다. 타율적이고 무력하며 별다른 전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붙드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런던의 ‘현대 기독교 연구소(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rianity)’의 마크 그린(Mark Greene)의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참석했던 그리스도인의 절반만이 일을 주제로 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 47%가 설교가 일상의 삶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줄어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 그 주된 원인은 성경의 내용이 일상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기독교적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가 이 책임을 스스로 지고, 철저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 만큼 충분히 단호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비슷한 위기의 예를 성경에서 한번 찾아보기로 하자. 예루살렘이 바벨론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파괴되었을 때 유다의 많은 주민들이 유배지로 끌려갔고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페르시아가 권력을 잡고 귀환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이러한 상황에 맞서서 책임을 미루지 않고 용감하게 달려드는 한 사람, 느헤미야와 함께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신다. 느헤미야는 울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계획을 세우고 담판을 벌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신다.

느헤미야는 유대지방에서 온 남자들에게서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게 된다. 성벽과 탑은 파괴되었고 그곳에 다시 정착하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위험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궁핍을 겪고 있고 수모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소식은 아마도 느헤미야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유배생활은 100년 전에 끝났으며 성전은 이미 70년 전에 다시 건축되었고 예배도 다시 드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재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환한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건전한 인식이 부족하였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이방민족들의 멸시 가운데 자신들의 땅에서 마치 이방인들처럼 방치되고 규율도 없이 살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궁의 고관이었던 느헤미야는 곧바로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깨달았다. 성전만으로는 아직 도시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 민족의 삶의 중심으로서 성전은 충분하지가 않았다. 물론 노래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선포되었다. 그럼에도 한 나라가 자신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본적인 요소들, 견고한 성벽의 보호, 무역과 교육, 문화가 번성할 수 있도록 정의로운 행정으로 질서를 잡아주는 손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영역들에서 재건이 중지된 채 있었다. 삼 세대에서 사 세대를 지나면서 귀환자들은 과도기적인 상태로 만족해 버렸다. 그들의 숫자 자체가 충분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숫자는 이방민족들 가운데 가소로운 숫자였으며 유대인은 진심으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그 아무것도 없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의 심장이자 자부심인 예루살렘이 더 이상 대충 유지되는 폐허가 아닌, 진정한 민족의 도시로 거듭나야만 민족의 비상을 꿈꿀 수 있음을 알았다.

비전과 함께 재건이 시작되다
‘하나님의 성(도시)’은 신약성경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이다. 자신의 본래 목적을 다시 충족시킨 예루살렘에 대한 느헤미야의 비전은 곧바로 우리를 산 위에 있는 성(동네)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으로 이끈다. 당신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이 그냥 어느 산 위에 있는 한 성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전 삶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때 이 성의 약속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를 온 세계에 나타내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미 이사야가 선포하였듯이 그곳에서 세계의 민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유익한 명령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 비전은 살아있고 역동적인 교회생활을 꿈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람과도 일치한다.
계속 산상수훈을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주 부수적으로만 예배와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며 주로 말씀하시는 것은 불의와 분쟁, 물질적인 소유들과 일상속의 진리들을 다루는 법, 결혼생활의 문제와 해결 등등, 인간의 삶과 밀접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이 눈에 뜨인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타락한 세상 속에서 찾는 사람들을 묘사하신다. 이들은 혹독한 현실에서 깨끗이 분리되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병적으로 완전주의자처럼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신이 가진 이상형의 잣대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거나 자신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고자 죄를 찾아 킁킁거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의 도구로써 어떠한 분쟁 가운데에라도 처하는 사람들이다. 산상수훈이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라면 팔복은 이 헌법의 서문이며 축제적인 서곡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정체성과 삶의 방식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나의 삶의 역사는 나의 자존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역사를 하나님의 세상과 하나님의 역사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물질을 대하는 나의 행동에 또한 즉각적인 효력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본래 목적을 이루고 우리의 참된 정체성 안으로 성장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성전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성(도시)을 건축해야만 한다. 예배와 교회의 여러 다른 모임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유익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여전히 어떤 교회들은 ‘후기기독교적 새로운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운 예배로 몰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성전이 잿더미 위에 있는 한 그곳으로 길을 잘못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소비숭배의 우상들이 오래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영적인 배고픔 또한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 매일의 ‘흩어짐’
정체성은 내가 하는 일 안에서 표현되지만 그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나는 물건을 사든지, 사무실에 있든지, 친구를 방문하거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식탁 앞에 있든지 여전히 내 가족의 한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있든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처럼 잘 흩어져 있든지 교회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나 슈퍼마켓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도, 교회나 축구장이나 술집 혹은 콘서트 장에서도 –또 찬양과 설교와 주기도문이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이다. 우리가 예배나 구역모임에서 함께 있을 때, 그것은 물론 교회지만 사실 교회는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성찬은 이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포도주는 수많은 포도송이로 이루어지며 빵은 수많은 곡식알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예수님은 공동의 축제 속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의 한 부분이 되며 우리는 예수님의 한 부분이 되고 이 상태는 우리가 다시 일상 속으로 흩어질 때에도 여전히 변함없다. 어쩌다 우연히 예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곳-우리가 있는 곳-은 예수님이 실제로 계시고 싶은 그 장소이다. 그곳에서 로마서 12장 1-3절에 따른, 참된 ‘영적인(이성적인)’ 예배가 계속된다. 이 영적인 예배가 ‘산 제물’인 까닭은 이 예배가 나눠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내 삶의 조각들만 제물로 바친다면 그 예배는 분리된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전체 실존으로 하나님을 따른다면 상황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삶의 방식이 싹트게 된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영적인 일과 자연적인 일로, 하나님과 세상으로, 기도와 일로, 개인적인 관계와 사역적인 관계, 돈을 버는 일과 자발적인 봉사, 혹은 그밖에 우리가 삶의 분열증을 앓게 만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우리 중심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우리가 모든 삶의 중심에서 예수님께 그분의 자리를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항상 중심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돌연 교회 안에서의 임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회사나 시민단체의 설립을 위해, 어떤 특정한 곳으로 이사를 시키기 위해, 시의회의 의원이 되게 하시거나 문화 사업에 활발하게 참여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부르셔서 우리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이 영역들에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하신다. 

세상에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러나 역시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하는 영역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딸을 둔 우리 교회의 한 부부는 이를 하나님의 기회와 명령으로 이해하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 부부는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아무 생각 없이 권하는 것처럼 항상 ‘교회에 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간에 그들은 듣지 못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교회이다. 여러 교회에 속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도시 안에서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노숙자들이나 중독증 환자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교회이다. 때때로 이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 못하기도 한다(그리고 이를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탁받은 명령을 순종하고 있는 한 그들은 불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영역을 마련해 두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빛을 비추어야할 장소 혹은 사람들의 모임 말이다. 그렇게 이 빛은 주일예배라는 말 아래에서는 결코 비출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보이게 될 것이다.

오직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하다
느헤미야로 되돌아가 보자. 현장을 둘러본 후 느헤미야는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애를 써야만 발전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벽은 여러 부분으로 세분되어졌고 각 지파에게 한 부분씩 맡겨졌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산 위의 동네(도시)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건축하고 동시에 이를 공동의 과제로 이해할 때에만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건축영역도 다른 영역과 경쟁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능력과 경험과 가능성들로부터 이익을 취한다. 주부는 매니저로부터, 목사는 청소년으로부터, 정보학 전공 대학생은 정신과의 간호사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결국 우리는 똑같은 삶의 방식을 다양한 장소에서 습득하려고 시도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또 어느 누구와도 자신이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각자는 오직 자신의 고유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정받은 지역 위에서만 건축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이 도시의 건축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에 보관되어 있다. 각 개인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영적인 대가족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혼자서는 우리 모두에게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연합된 능력으로도 이런 재건사업은 방해 없이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연합은 늘 위협받는다. 느헤미야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저항세력이 내외부에서 일어났다. 내부에서는 의심과 체념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파괴된 예루살렘만을 경험했으며 당시에는 계획이나 청사진 같은 것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목표를 눈앞에 그려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어떤 것도 실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폐허와 잔해들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의 위력 앞에, 주위에 널려 있는 엄연한 증거들의 위력 앞에 굴복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냥 평범하고 좋은 교회(전통적인 의미에서)가 되자!” “모든 게 나쁜 것은 아니잖아. 좋은 성전도 아주 중요해. 또 우리 예배와 프로그램에도 개선할 일이 많이 있고.” “그렇게 외부의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장기적으로 너무 힘들어.” “세상을 바꾼다고? 그렇게 큰 야심을 갖기보다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잘 돌보는 게 나을 걸.” 변화는 편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어온 기득권을 잃을 때 실패자로 느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을 능숙하게 자신의 이익에 이용한다. 희생자들은 이전이 훨씬 좋았다고 분노한다. 자신의 고통과 손실은 의심스러운 경우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 느헤미야의 경우처럼 짐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에는 많은 지혜와 그에 해당하는 추진력이 요구된다.

깨어 있기
밖으로부터도 저항이 일어났다. 성전건축은 이웃민족들의 지도자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성벽건축은 달랐다. 새로운 권력의 중심은 지배관계를 위협한다. 물질주의 속에서, 시장의 고유법칙 앞에 굴복한 세계 안에서 우리는 먼저 느헤미야처럼 조롱을 예상해야만 한다. 그렇게 허술하고 아마추어적인 성벽은 한 마리의 여우에 의해서도 무너지겠다고 느헤미야의 대적들은 비웃었다. 오늘날 우리는 먼저 세상에게 낯선 이상주의자들로 우습게 보이거나 뒤떨어진 촌놈들이라고 조롱을 받게 될 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탄식했지만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다.

조롱에 이어 갑작스러운 침입이나 폭력적인 시위 등의 위협이 따랐다. 수책 또한 대적들의 전술에 속했다. 느헤미야를 안전한 성전에서 잠자도록 해서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함정이 만들어졌으나 느헤미야는 깨어있는 면에서도 모범적이었다. 그는 한눈을 팔지도 되돌아가지도 않았다. 우리는 미혹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때 사장이 승진에 불리한 결과로 위협을 한다든지, 이웃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 거나 아무 일도 아닌데 친척들과 불화가 생긴다든지 하는 일들을 뜬금없이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냉정한 상황에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깨어 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흔들림 없이 의지하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 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할 수 있다. 이 ‘대적들’의 가장 큰 우두머리는 우리의 두려움이다. 대적들에게 좋은 일을 절대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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