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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은 선택하는 게 아니다(옮긴글)
 신학& 기독교 세계관
신학공부 / 기독교세계관 공부
작성자 she
작성일 2020-10-17 (토)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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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10      
IP: 118.xxx.5
부르심은 선택하는 게 아니다(옮긴글)
이 글은 쟁기출판사 홈페이지(www.plough.com)에 실린 글의 끝부분을 옮긴 것입니다. 전문에는 저자의 어린시절과 가정사, 목회자로 부름받은 과정 등이 매우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얻게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쓴 윌리엄 윌리몬(Rev. Dr. William H. Willimon)은 듀크대학 교목을 지냈으며, 이 글의 원 출처인 “어쩌다 목사: 회고록”(Accidental Preacher: Memoir, Eerdmans, 2019)를 비롯해 많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가[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시 100:3, 새번역). 주일학교 때 반쯤 암송한 또 다른 빛나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뭔가를 만들기 좋아하신다는 걸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당신이 바닥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우리가 자생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걸 시사한다. 존 알렉산더(John Alexander)가 2012년에 낸 책 “교회됨(Being Church)”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신약성경에서 부르심(calling) 또는 소명(vocation)이란 용어는 취업이 아니라 제자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영생'에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거나(딤전 6:12), 또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도록 부름을 받거나(고전 1:9), 어두운 데서 불러냄을 받거나(벧전 2:9),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도록 부름을 받을 수 있지만(롬 8:30) 어떤 직업을 갖도록 부름을 받지는 않는다. 바울은 천막제조자였지만(행 18:3) 어디서도 천막제조자로 ‘부름을 받지는’ 않는다. 천막제조는 식탁에 빵을 공급했으며, 이것만으로 바울이 이 일에 최선을 다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직업을 가지며, 소명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소명을 “당신의 지복(至福) 따르기”라고 유명하게 정의한다. 신학자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 Buechner)도 비슷하게 소명은 “당신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주림이 만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불을 던지시고(눅 12:49), 아버지가 아들과 분쟁하게 하시며(눅 12:53),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마 10:34) 지복을 의심스럽게 하신다. 예수님은 때로 지복을 무너뜨리는 사명에 참여하라며 징집영장 내밀고 선동적 소명을 주신다. 바울에게 물어보라.
“나는 사람들과 일하길 좋아해. 그러므로…” 또는 “나는 말을 잘 해, 그러니 당연히…” 이것은 소명의 방식이 아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일은 어떤가? 아니라고? 끌리지 않는다고? 광고직은 어떤가?

소명은 당신의 필요나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은 소명을 통해 당신의 삶이 변화되어 그분이 이루시는 세상 구속의 한 결과가 되길 원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주 평범했고, 재주도 없었으며, 별 볼일 없는 촌놈이었다. 이들만 보더라도, 타고난 달란트나 내적 열망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을 맡김으로써 삶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소명과 더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르시는 그리스도가 없다면, 내면의 달콤한 목소리는 우리가 불러낼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관적 느낌에 바투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중에 누가 하나님이 판에 박힌 듯이 요구하시는 것만큼 희생이 따르고 미친 일에 자신을 내어맡기겠는가?

“마리아, 어떻게, 당신의 삶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혼외 임신을 하고,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 한 아픔을 느끼며, 십자가에 달려죽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낳기로 결정했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소명은 자아의 후미진 곳을 뒤적거림으로써 발견되길 기다리는 내적 의향이 아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듯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요 15:16).

내가 젊은 시절 암스테르담의 긴 밤에 던졌던 “도대체 어떻게 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부르시는 거냐고요?”라는 질문에 성경이 답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선택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선택하신다.

소명은 당신의 필요나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거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런 저런 형태의 제자도를 두셨다.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로 소명을 받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특별히 사용 받을 거라 기대할 수 있다. 나의 행복한 목회 생활의 가장 행복한 부분 중 하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이다. 갇힌 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교회 재정부 모임에 참석하거나, 환자의 요강을 비우거나, 경건한 자녀들을 양육하거나, 배고픈 자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거나, 공립학교 교사가 되라고.

노스사이드 연합감리교회 조찬 기도회에서(경건하지 않은 시간에 하나님과 소시지 비스킷이 있는 시간에), 나는 거기 모인 평신도들에게 경건하게 요청했다. “매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조니가 어젯밤에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음전운전입니다. 조니를 꺼내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매리가 아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알코올 중독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나의 목양에 감동을 받지 못한 한 형제가 물었다.

“보석금은 어디서 구하시려고요?” 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이것은 기도 제목에서 빼주세요. 저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셋이 유치장 앞으로 갔다. 겁에 질린 젊은이가 구석에 웅크린 채 훌쩍이고 있었다.

“자네, 술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게 얼마나 됐나?” 우리 가운데 하나가 쇠창살 너머로 물었다.

“저는 ‘문제’가 없어요.” 조니가 대답했다.

“다시 묻겠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거짓말을 한 거지? 나도 폭음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아요. 군대 있을 때부터 술 문제 때문에 힘들었거든. 그래서 자네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우리가 자네를 여기서 꺼내 줄거야.” 변호사인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랑 우리 집에 가자고. 우리 아이들은 다 독립했어. 조니의 어머니는 사는 게 힘드시잖아. 나는 다른 사람하고 클렘슨 대학 풋볼팀 경기 보는 걸 아주 좋아해.”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렸다.

1981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노스사이드 연합감리교회는 내가 새로운 목사로 부임하기까지 몇 년 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상황이 너무도 안 좋아서 그 이전 해에는 성탄절 예배를 준비할 돈도 열정도 없었다. 의기소침한 교인들은 승리가 필요했다. 설령 나 혼자 초를 만들고, 포인세티아 꽃을 기르며, 가성으로 “오 거룩한 밤”을 불러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노스사이드에서 나의 첫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감성이 물씬 풍기는 촛불 축제가 될 터였다.
성탄절 전날 밤 설교의 원고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데, 형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

거의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내가 새 교회에서 맞는 가장 중요한 밤을 자신이 떠날, 이번에는 영원히 떠날 날로 선택했다. 그날 밤에 차를 몰고 교회에 가는데,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게 부끄러웠다. 이 비극을 슬퍼하려 애썼지만, 나의 슬픔은 먼 친척이 죽었을 때보다 크지 않았다. 서둘러 교회에 들어갔다. 목사 가운을 입고, 띠 장식을 단단히 매고, 촛불을 밝히라 지시하고, 찬양대에게 내가 좋아하는 “적막한 한 겨울에”(In the Bleak Midwinter) 대신 “참 반가운 성도여”(O Come, All Ye Faithful)를 입당송으로 부르게 했다.

당신에게 교회는 이런 곳이다. 교회는 우리가 찬양하고 싶지 않고 믿음이 있다고 느끼지 못하며 “기쁘고 의기양양하지”(joyful and triumphant, <참 반가운 성도여>라는 찬송에서 “다 이리 와서”로 번역된 부분―옮긴이) 않을 때라도 행진하며 찬양하라고 강요한다. 교회는 당신이 적절한 동기를 부여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이 목사로 부름을 받을 때, 목사이고 싶지 않지만 목사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수없이 많다. 당신은 아픔을 겪고 있고 어쩌면 감정적으로, 신학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을지 모른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도록 돕는 데 전문가여야 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할 수 있다. 목사로서,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밀린다. 당신은 그들에게 유일한 목사이며,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한 번뿐이다. 그래서 당신은 띠를 단단히 동여매고 기도한다. “나를 이곳에 인도하신 하나님, 내게 냉철한 결단력을 주셔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게 하소서.” 당신은 그러고 싶지 않을 때라도 나가서 그들의 목사처럼 행동한다.

당신은 목사가운띠를 단단히 매고 기도한다. “나를 이곳에 인도하신 하나님, 내게 냉철한 결단력을 주셔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게 하소서.”

다른 많은 경우와 교회에서처럼, 그해 슬픈 노스사이드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목회술을 발휘하며 내 소명을 수행했다. 일어나 설교자 연기를 했다. 나를 사기꾼이나 위선자라고 비난하지 말라. 그날 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게 거의 감사했고, 세례가 나 자신의 가족보다 엉망인 교회 가족을 내게 준 게 기뻤으며, 임신한 동정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한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 아들보다 더 뉴스거리가 된다는 게 즐거웠다.

나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의 불행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나는 특권을 누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부르심을 받았으며, 내 소명을 받아들여 심호흡을 하고 강단에 서서 메시지를 전하며, 사람들이 그 밤을 헤쳐 나가도록 돕는 성경 구절을 제시해야 했다. 그들이 스스로에게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누군가 소식을, 에덴의 동쪽이든 그린빌의 북쪽이든 간에 어둠의 땅에 거하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야 했다. 설령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더라도(요 3:19), 하나님은 어쨌든 성육하신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의 역사 하나하나마다, 후회와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있다. 세상은, 좋기는 하지만, 절대 충분하지 않다. 완전한 구속이나 완전한 보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우리 유한한 인간과 한 가지 유한을 공유하신다. 하나님일지라도 우리의 과거를 없는 것으로 하지 못하신다. 잃어버린 날들을 되찾을 수 없으며, 과거를 바꿀 적절한 성경구절을 생각해 낼 수 없으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이때 당신은 말씀이, 영원한 로고스가 육신이, 우리의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신 것에 감사한다. 하나님은 영으로 남길 거부하셨다. 말씀이 침노해 우리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하시고, 빛이 우리의 어둠을 비추신다. 하나님이 혼란과 후회로 가득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이 이야기를 전할 사람은 우리뿐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는 노래한다. 참 반가운 신도여 다 이리 와서. 신도가 아닌 이들도, 다 이리 오라. 어쨌거나 그분께 경배하자.

놀라움 중의 놀라움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빌어먹을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린빌의 이름도 아이러니한 서밋 드라이브(Summit Drive, 저자가 담임하는 교회가 위치한 동네 -옮긴이)에서, 실의에 빠진 작은 교회가 도둑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의지조차 없는 감성적으로 미숙한 목사와 함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께서 우리의 유한에 들어오셨고, 우리의 허비된 역사에 성육하셨다.

나는 어쩌다 태어났고 아버지 없이 살았다. 하나님, 당신께 올 수 없는 입술이 부정한 자들에게 오소서. 주님, 위험하게 사소서: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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